아버님의 4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추도예배를 드리는 순서에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에는 기대를 넘어서는 서로가 잊어버리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속에서의 아버지에 관한 낯설지만, 애틋하면서도 익숙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예배 후에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뵈었다. 면회를 가서 보니 복지사의 손길을 통해 그나마 말끔하게 단장하신 어머니께서 휠체어 앉은 단아한 모습으로 형제들 앞에 모시게 되자 어머님은 “뭐 하러 왔느냐?”고 하셨다.

 여전히 자식 걱정하시는 모습에 모두들 잠시나마 안도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면회 신청을 잘못 전달받은 탓에 지난주 토요일에 ‘시간이 되었는데 왜 안오시느냐’는 연락을 받았다는 형님의 얘기에 모두들 지난주에도 어머님은 요양보호사의 손길로 단장을 하고 준비하셨을 거라는 추측들을 얘기했다. 자주 면회하는 것이 신체적,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견들이 오갔다.

 어머님께 기도부탁을 드리니 망설이신다. 아마도 자녀들이 듣는 기도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으신듯했다. 그래서 함께 어머님을 위해 기도해드리고 개별적으로 안부와 궁금한 얘기들을 해드렸고 이러저러한 말씀을 들었지만, 보청기가 없이 듣는 탓으로 간간이 동문서답의 경우가 많았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업무를 담당하는 복지사 선생님은 어머님이 얘기를 잘하시는 줄 몰랐다고 했고 실제적인 돌봄을 맡은 요양사 선생님은 평소에 잘 웃고 얘기를 잘하신다고 했다. 아마도 어머님이 친근히 여기는 분에게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으신 듯 했다.

 입구에서 인사를 드리고 물러서 나오며 휠체어에 앉은 어머님의 뒷모습을 보자니 문득 어머님이나 우리도 서로의 생애속에서 겹쳐 지내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따로 모여 현실적인 요양비에 대한 것으로 우선 첫 달은 사남매가 균등하게 나누어서 분담하고 추후에 요양 듭급을 적용받는 비용이 나오면 다시 상의하기로 하였다.

 이제 곧 명절이 다가오는데 설날에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잠시 외출만해서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좋은지 혹은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의견이 있었는데 우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어머님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언 23:22)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형제되고 동역자된 김만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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